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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도서 2025. 2. 10. 14:55

     

    1년 전에 빌린 책인데 한동안 들고만 있다가 이제 읽었다. 이사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 재밌는데 읽어볼래?' 그런 과정도 없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냥 가져다 맡겨버리시는 스타일이라서ㅎㅎ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떠맡(?)았다. 실은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슬쩍 펴봤을 때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던지라 이번에는 썩 내키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다른 범주의 독서를 하시는 분이라 빌려주시면 빌려주는 대로 읽곤 했었다. 이렇게 남의 책을 오래 빌려서 들고 있던 것도 정말 오랜만(몇 십년만)이라 '그냥 읽고 치우자'는 마음으로 읽은  <밝은 밤>과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깊이 와닿아 감상을 남기려고 한다. 

     

    최은영의 소설은, 소설이라는 허구의 장막을 두르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사실적이다. 내 감상은 <82년생 김지영>의 말랑한 버전(형식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내용이 결코 말랑하지 않다)이라는 요약이다. 

     

    두 권 밖에 읽지 못했지만 최은영 소설 전반에 자리한 여성 중심의 서사는 때로는 편안하고 때로는 불편함을 주면서 나를 천천히 이끌었다. 밝은 밤에서는 주인공 '지연'이 할머니와 서로 알아보는 장면에서 굉장히 많이 울어버렸다.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전개이기도 했고, 전개를 위해 필요한 장면이기도 했는데, 무엇 때문인지 그 부분을 읽을 때의 나는 무척 연약해져 있었던 것 같다. 순간 누군가 알아봐준다는 그 따뜻한 마음이, 다그치지 않는다는 점이 위로처럼 여겨져서 였나 보다. 지연이 희령에서의 생활을 다독여갈 때쯤, 나는 이사님께서 빌려주신 두 번째 책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초에 제주여행을 다녀왔는데, 연초부터 나를 둘러싼 안팎으로 많은 실망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 추스른 다음 두 번째 책을 펼쳤다.  

     

    이제야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이야기를 하게 된다. 앞선 책과 달리 단편들로 이뤄진 책이다. 그래서 더욱 끊어 읽기 좋은 짧은 호흡의 책이다. 오히려 최은영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한다면 단편집을 먼저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앞서 간 사람의 희미한 빛을 따라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학보사 선후배와 동기 간의 이야기를 담은 '몫', 직원인 나와 인턴의 모습을 쓴 '일 년', 서신의 형식을 빌어 놓은 '답신', 오빠와 나 그리고 딸과의 관계를 그린 '파종', 감정적으로 통제가 심한 이모와 나와의 관계를 쓴 '이모에게'... 

     

     

    이 모든 이야기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기도 했고, 주변인물이기도 했고, 관찰자이기도 했으며, 가해자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기민하게 반응하면서 분위기를 맞추는 사람, 숨죽여 소리를 내지 않고 우는 법밖에 모르는 사람, 다른 사람의 기분을 살피며 최대한 융합하기 위해 '아무거나 좋다'고 말하고, 심지어는 '아무거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일행 대부분이 좋아하는 취향을 재빨리 감지해 'ooo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 어느덧 40을 바라보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다른 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오롯이 혼자 있을 때만 편안해졌다. 

     

    읽어내려가는 동안 몇 번이고 울컥하곤 했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도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들이 딱히 행복해지는 결말은 없었던 것 같지만, 감정이 건드려지는 몇 차례의 장면들을 지나고 보니 위로같은 느낌을 받았다.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책은 다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책이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가 있는 거라고. 지금이 그 때였나 보다. 나는, 위로 받고, 또 누군가를 위로할 힘을 얻으며 이 겨울의 끝을 최은영의 소설과 함께 하고 있다. 

     

    고백하자면, 초반의 몇몇 단편 첫 페이지에서 나는 화자가 남성이라고 생각한 경우가 많았다. 화자의 성별을 유추할 수 있으면 상대는 반대되는 성별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그 추측은 여지없이 깨졌다. 이토록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니. 그만큼 문학계에서 여성 서사의 작품이 희소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책 꽤나 읽는다는 사람이면서 여성 서사의 책을 부러 찾아 읽어보는 일이 있는 사람인 나조차 남성 서사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내 사고 방식 또한 남성 상사나 남성 지식인, 지도자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것도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굳이 여성 작가나 여성 감독의 작품을 찾아 보거나, 여성 서사인 내용을 보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굳어져버린 내 사고 방식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쨌거나 여자인 나, 그리고 우리는 여자인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배신, 암묵적 지지 또는 반대, 그리고 애증이 얽힌 관계를 쌓으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 관계에 대해 깊이 들여다 보는 경험을 가진 적이 별로 없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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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종 문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한다. 문학은 아름다울 때 감동을 주지만, 우리 삶에 가까이 다가와 있을  때 더 깊은 감동과 메아리를 남긴다. 최은영 소설은 가깝다. 일상 속에서, 관계 속에서 번번이 주저앉아 버리고 마는 개인에게, 이토록 부조리하고 억울하게 느껴지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든 다시 딛고 일어나려는 개인에게 최은영 소설은 너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메세지를 건넨다.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은 권력, 그리고 그 안의 고뇌, 암묵적인 무시까지 세심하게 담아내 그 안에서 공감과 반성을 느끼게 한다. 정희진의 추천사처럼 "이보다 더 강력한 문학의 존재 이유는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소설로서도 문학으로서도, 그리고 시대를 반영한 작품으로서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역시나 이사님 추천 도서-라는 느낌. 

     

     

    2025.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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