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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따스한 온소바와 고소한 붕장어로 몸을 데우다(미미면가 신사점)카테고리 없음 2023. 12. 19. 08:48
차가운 바람은 때로 청량한 느낌을 준다. 아직은 매운 추위가 아니지만 옷자락을 여미게 되는 겨울의 문간에서 따뜻한 소바 국물 생각이 나버렸다. 미미면가는 신사동에 두 곳이 있는데, 본점까지 가기에 조금 귀찮아져 더 가까운 신사점으로 걸어갔다. 미미면가 신사점 자그마한 노포 같은 외양의(2012년에 열었으니 거의 노포로 가는 중일까) 본점과 달리, 신사점은 모던한 공간이었다. 겨울이니 당연히 온소바다. 냉소바를 먹을 수는 없다. 달큰하고 뜨뜻한 국물에 구수한 고등어구이 온소바를 먹을까, 바삭한 튀김옷과 채소의 향기와 즙을 동시에 맞볼 수 있는 가지튀김 온소바를 먹을까, 그도 아니면 부드러운 마즙 온소바를 먹을까. 주문하기 전에 약간은 망설여졌다. 마지막에 충동적으로 마음을 돌려 붕장어튀김 온소바를 골라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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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실화, 계단: 아내가 죽었다(The staircase, 2004)다큐멘터리(해외) 2023. 10. 27. 13:03
넷플릭스에 볼 만한 게 없나 훑어보다가 독특한 제목에 끌려 한 편을 보게 된 다큐멘터리가 대작의 냄새를 폴폴 풍길 확률은? 누가 보아도 화목해보이는 부부의 여유로운 하루가 마무리된다. 와인을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웃음소리로 채워진 수영장에서의 시간. 행복한 시간이 붉은 피로 얼룩진 건 몇 시간 후의 일이다. 줄거리 요약 말 그대로 피가 흥건했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사망해버린 아내의 피가 계단을 다 물들였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일 겨를도 없이 남편이 용의 선상에 오른다. 단순한 사고일까? 완벽하게 계획된 살인일까?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 살고 있던 한 기업의 임원인 아내 캐서린과 남편인 소설가 마이클 피터슨 사이에서 2001년 12월 9일 일어난 실제 이야기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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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아름다움, 불꽃축제에 대한 단상기억 2023. 10. 13. 11:25
거창한 제목이다. 하지만 매년 가열차게 터트려대고 몰려가는 불꽃축제에 대해 한 마디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 불꽃축제를 즐기려고 간 건 아니었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관련 행사를 멀리서 나마 참관하고 행사가 끝나기 전, 본격적으로 귀가 행렬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가려고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여의도 일대를 가득 채운 화약 냄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어두워진 밤하늘이 희뿌옇게 장막을 두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불꽃축제에 딱히 의견은 없었다. 다만 붐비는 곳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가봐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을 뿐이다. 즐길 사람은 즐기고, 취향이 아닌 사람은 안 가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접하고 보니,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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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 2014)다큐멘터리(해외) 2023. 10. 4. 13:31
한줄평** 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뜨겁고 차가운 일. 줄거리 영화는 인도네시아 학살(1965년과 66년 사이에 공산주의자로 간주된 자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에 대해 다루고 있다. 반공주의 광풍으로 인해 5천 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학살자들의 일부를 인터뷰하는 다큐멘터리로, 주인공은 손수 사람들을 죽였던 안와르 콩고다. 안와르 콩고는 수많은 공산주의자를 죽인 영웅으로 살아가고 있다. 당시 연관된 사람들의 인터뷰도 이어진다. 안와르가 지시를 받았던 신문사의 발행인은 안와르는 아무것도 아니고 지시한 대로 따르는 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끌려온 자의 결백은 의미 없었고, 대답은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바꿨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자신은 눈만 깜빡이면 되었기에 사람을 죽이는 천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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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YRE: 꿈의 축제에서 악몽의 사기극으로 (2019)다큐멘터리(해외) 2023. 9. 22. 16:01
2017년 마약왕으로 악명 높은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사유지었던 바하마의 한 섬에서 지상 최고의 음악 축제가 열린다! 기발하고 화려한 홍보로 기대를 모았던 파이어 페스티벌. 하지만 그림 같은 해변의 빌라도, 근사한 파티도, 모두 거짓이었던 버라이어티 대국민 사기극. 장르: 다큐멘터리(영화) 감독: 크리스 스미스 시간: 1시간 37분 Fyre 앱을 만든 사업가 빌리 맥팔랜드와 힙합 뮤지션 자 룰의 만남으로도 (미국에서) 유명했던 페스티벌이었다고 한다. 실상은 빌리 맥팔랜드라는 자가 쌓아올린 모래성이었다고나 할까? 빌리 맥팔랜드의 첫 사업은 매그니시스라는 기업이었다. 때깔나는 신용카드를 만들어서 발급해주고, 마케팅을 꽤나 힙하게 한 모양이다. 카드를 가진 사람들에게 특권이 주어지는 것 같은 이미지를 팔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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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신도: 기도하고 복종하라 (Keep Sweet: Pray and Obey , 2022)다큐멘터리(해외) 2023. 9. 14. 08:29
악명 높은 사이비 종교 근본주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FLDS)의 범죄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남편에게 널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너를 바쳐야 한다. 의무를 다하라. 주님께서 네게 맡긴 일"이라는.. 멍쌉소리를 한다. 다큐멘터리는 시종일관 기괴하고 기이한 그들의 신앙과 교리를 보여주면서 초대 교주 루론 제프스,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차기 교주인 워런 제프스의 악행들을 보여준다. 10대 어린 여자애들을 강제로 어른 남자와 결혼시키고, 여자를 재화처럼 주고받는 일들이 횡행한 이 작은 국가 속에서 여성의 인권도, (심지어 남자들의 인권까지) 말살당하는 사이비 종교를 다루고 있다.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많은 아이를 낳아 많은 여자아이를 교주에게 바칠 수록 천국에 가까워진다는 ;;;;;;; 교리를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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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도시예찬 3부 나는 도시인이다 (2021)다큐멘터리(국내) 2023. 9. 11. 10:58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도시는 환경을 파괴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삭막한 공간이라고.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곳이라고. 이 다큐는 왜 가난한 사람일수록 서울을 떠나지 못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나 역시 얼마 전 '서울 고독사 위험 가구 5만 2천'이라는 기사를 봤다. 물가도 비싸고 팍팍한 서울에 굳이 모여 살면서 왜 이곳을 고집하는지, 특히나 직장 문제가 아니라면 왜 이곳에 버티고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직장만 아니라면 복잡한 이곳에 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의외의 사실들을 알게 됐다. 부자나 중산층 이상은 상관이 없지만,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은 도시의 인프라가 있기에 집 밖을 나오기만 하면 그런 시설들을 무료, 또는 저가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편리한 지하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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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사람은 도망치고 싶을 때, 갈 곳이 없다기억 2023. 9. 5. 10:14
남편 회사에 안좋은 일이 생겨서 며칠째 저기압이다. 나는 되지도 않는 리액션을 해주기 위해 거듭 질문도 하고 같이 화도 내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도 물어보면서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갑작스런 해외 출장이 잡히자 짐을 챙기는 걸 도왔다.주말에 일찍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는 편인데, 일찍 일어나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보냈다. 아침부터 청소, 설거지, 빨래를 하면서 오전을 채웠다.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함께 갔었을(가기로 했던) 주말 일정도 혼자 갔다. 남편에게 일이 생기면서 못가게 된 것이라 서운해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사건을 해결하고 몸도 마음도 지쳐 집에 돌아왔을 때 편히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기분 좋으라고 계속 집을 치웠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고, 빨래를 한 번..